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롱 황제 (문단 편집) === [[깐틴|서산멸망전]]과 황제 즉위 === [include(틀:상세 내용, 문서명=깐틴)] 1790년부터 시작한 서산조와 광남의 최후의 전쟁은 부춘 조정의 [[꽝쭝]]과 자주 교전하였다.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광남군은 전투에서 유리하게 싸워갔으며, 반면에 귀인의 [[타이득]]과 [[꽝쭝]]의 뒤를 이은[* 정확히는, 타이득의 경우 깐틴이 무력 합병한 것이다. 이것은 응우옌반바오가 응우옌푹아인과 내통하는 배경이 되었다.] [[깐틴]] 시기 서산조는 내분으로 쇠퇴해 쩐꽝디에우의 활약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. 결국 깐틴의 제후인 [[응우옌반바오]]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적군인 응우옌푹아인과 내통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는 등 서산의 내분은 심화되기 시작했다. 이 소조의 변으로 서산조엔 많은 인재들이 처형당하였고, 이러한 혼란을 틈타 광남군이 재차 공격해 1802년 서산조의 수도 탕롱을 함락하여 떠이선 왕조가 멸망하였다. 이후 1802년 6월 1일 응우옌푹아인은 [[후 레 왕조]]의 연호 경흥(景興)을 폐지하고 가륭(嘉隆)이라는 새 연호로 개원하여 베트남 역사상 최후의 왕조인 [[응우옌 왕조]]가 탄생하였다. 한편 서산의 잔당은 [[청나라]]의 [[가경제]]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했고, 포로로 붙잡힌 깐틴과 서산 일족은 [[조리돌림]]을 당한 후 사형당했고, 응우옌반냑과 응우옌반후에의 시신은 부관참시되었다. 서산멸망전의 자세한 내용은 깐틴 항목 참조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